[골로새서 3장] 용서가 어려울 때, 꼭 기억해야 할 사실

2024. 4. 23. 16:27카테고리 없음

[골로새서 3장] 용서가 어려울 때, 꼭 기억해야 할 사실

<출처> 말씀노트 YouTube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로새서 3:13)

불만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다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부대끼는데 불만이 없을 리 없죠.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까닭은

단 하나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나 같은 사람 받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용납하고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이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한없이 받아야 줄 수 있어요.

그래서 받지 않으면 못 줍니다.

내가 부족하면 못 줘요.

제가 대학 다닐 때

하도 데모가 많아서 휴교가 맨날 있었죠.

어느 날, 이러다가 대학 졸업해도

진짜 머리가 텅텅 비어서 나가겠다.

이런 걱정이 덜컥 들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경제학을 좀 공부해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조순의 "경제학 원론"과

새뮤얼슨이라는 사람이 쓴 "경제학(Economics)"

이 것들을 경제학 파 보겠다고 공부를 했는데

첫 장을 보면서

경제학의 출발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어요.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다에서 출발한 게

무슨 해결이 되겠습니까

해결점이 없어요.

경제학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단 걸

결론을 냈습니다.

무한한 분으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인간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분이 우리 안의 중심에 좌정하셔야

무한의 문제 / 유한의 문제가 끝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목마르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죠.

그래야 용서가 되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에 그걸

<1만 달란트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말이야 1만 달란트 받은 거야."

용서 받은 총액을 따지면 말이지.

그런데 네가 지금 너 옆에 있는 사람한테

100 데나리온 빚졌다고 따지고

그 사람을 잡아다가 때리고 고소하고

그럼 되겠냐?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1만 달란트 지금으로 따지면

'조'단위의 돈이에요.

네가 받은 건 그렇게 큰 걸 받았는데...

그래서 그야말로 우리가 받은 걸

헤아려 보지 않으면

우리는 용납하고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를 용납하고 누구를 용서해요.

자기 자신도 용납이 안 되고

내 속에서 태어난 내 자녀들도 용납이 안 되는데

누구를 도대체 용서하고 산다는 얘기예요.

다 뭐 그냥

용서하는 척하고 사는 것이죠.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 받았다는 것.

용서 받았다는 것.

이 놀라운 감동과 감격이 무디어지면

모든 것이 헛것에요.

백날 없는 것 따지면서 살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받은 것을 수없이 한번 기억해 보세요.

하루 종일 세어봐도 다 못 세잖아요.

공기에서부터 태양에서부터 바람에서부터

신선한 이 모든 것에서부터

주위의 사람들까지...

우리가 어제 감사를 논하면서 그랬어요.

우리가 언제 교회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이나 했습니까?

1년 전만 하더라도 이 교회 올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를 와갖고 은혜를 나눌 수 있냐.

따져보면 아무도 준비한 사람이 없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지만

그냥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셔서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피차 용납한다는 것이죠.

피차 받아들인다는 게

내가 너무 받은 게 많아야 용서가 돼요.

여러분 살아가면서 왜 섭섭한 일이 없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얼른 관점을 고쳐서

내가 받은 것을 바라보고

내가 용납 받고 용서받은 것을

그쪽을 잠시 좀 쳐다보면

용서가 되는 것이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로새서 3:14)

아무리 대단한 걸 하더라도

마지막을 사랑으로 장식하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 으뜸이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게 사랑으로 감싸져야 되고

사랑으로 마무리가 돼야 된다는 것이죠.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이게 사도 바울의 결론 아닙니까

왜냐하면 본인이 그렇게 살아 봤으니까.

마지막에 사랑으로 띠를 매는 것.

이 인생의 완결이 없으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헛살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능력이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사랑하게 하도록

우리가 방해만 안 하면 돼요.

그분은 우리 안에서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하고자 하십니다.

근데 누가 걸림돌이에요.

내가 걸림돌이죠.

주님은 끊임없이 내 안에 거하시며

누군가를 용납하고 용서하고자 하지만

누가 방해합니까.

내가 용납하지 못하고

내가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의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이 말씀 가운데

그는 모든 문제의 뿌리

그게 바로 "사랑의 결핍"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까

사랑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이죠.

근데 엉뚱하게도

문제의 뿌리는 내버려둔 채

줄기나 가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는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본질로 돌아갈 때

문제는 시간이 걸릴 것 같고

해결이 안될것 같고

뭐가 달라질 것 같은지 우리를

의심케 하지만

아니요

문제는 시간이 걸릴지라도

본질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가지, 잎을 건드려 봐야

뿌리가 아닌 이상

된 것 같은 대증요법 대응요법일 뿐이고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 불평합니까?

알아달라는 거예요.

왜 비난합니까?

사랑해달라는 거예요.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아~나를 알아달라는 거구나'

무슨 비난을 퍼붓듯

'아~ 저 사람 사랑이 필요하구나'

이렇게 언어가 해석이되고

그렇게 용납이되고 용서를 하고

사랑을 하면 그게 '교회'에요.

<출처> 말씀노트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