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실존 인물들의 12.12 사태 이후 삶 근황 정리

2024. 1. 16. 17:15카테고리 없음

영화 서울의 봄 실존 인물들의 12.12 사태 이후 삶 근황 정리

<출처> 리뷰한스푼 YouTube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했던

하나회의 세력과

반란군에 맞서 끝까지 싸웠던 인물들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태완 장군

정우성 배우님이 연기한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 12.12 군사 반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죠.

결국 반란군의 승리로 돌아간 후

그는 보안사에 끌려가게 되었고

당시 실시간 뉴스로 생중계되기도 했습니다.

몸무게가 12kg이나 줄었을 정도로

서빙고 조사실에서

45일간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풀려난 후 6개월간 가택연금 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장태완 장군의 아버지는

충격과 통탄에 빠졌고,

4개월 뒤 과음으로 별세합니다.

장태완 장군의 아들 또한

2년 뒤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그의 아들은 가족이 가택연금 생활을 하며

보안 요원들의 감시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학업에 매진하여 서울대에 입학할 만큼

영민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1982년 학교에 다녀오겠다며

대문을 나선 후 실종되었고

한 달 뒤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죠.

아들과 아버지를 잃은 장태완 장군은

자신이 두 사람을 죽게 한 것이라며

슬픔에 빠져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하나회에 적대심이 있던 그는

전두환이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하자

이를 수락하는 일도 있었는데요.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장태완 장군에 대한

불편한 시각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1994년에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으로 당선되어

27대 28대 회장을 지냈으며,

2000년에는 새 천년민주당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였고,

2010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당 지도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장태완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2012년

그의 아내인 이병호 여사는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군사 반란 다음 날인 12월 13일

해임됨과 동시에 강제 전역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장태완 장군과 마찬가지로

보안 사령부의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을 동반한 모욕적인 수사를 당하게 되죠.

이듬해 국방부 군법회의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한순간에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었으며,

형 집행정지로 6개월 후 출소한 이후에도

장교 급여분의 몰수

군인연금 수혜 권리의 박탈로 인해

경제적인 위기마저 겪습니다.

정 총장은 조용히 지내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의 제안으로 통일민주당의

부총재를 역임했지만,

결국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정치권에서도 완전히 발을 빼게 됩니다.

이후 5공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하고

신군부 출신 인사들을

고발하는 등의 노력을 해왔으며,

장성급 장교 퇴역자 모임인

성우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군사 반란의 피해자 예비역들의 권익을 위해 힘쓰다

2002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정병주 특전 사령관

그 역시 정승화 총장 장태완 장군과 마찬가지로

강제 예편(예비역 편입 전역)을 당했으며,

지속적으로 군사 반란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해왔습니다.

하지만 1989년 3월

경기 고양시(당시 고양군)의 산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요.

정병주 사령관의 죽음은

군 당국에 의해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그의 주변 인물들과 장태완 장군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며 자살을 부인해왔죠.

하지만 민주화 이후 재조사가 이루어졌음에도

증거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여서

결국 의문만을 남긴 채

자살로 종결되었습니다.

김진기 헌병감

군사 반란 직후 보안 사령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그는

결국 이듬해 신군부의 강제적인 핍박에 의해

자진 예편하게 됩니다.

사실상 강제 예편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그는

평생을 쿠데타의 악몽에 시달렸다고 전해집니다.

예편 후 조용히 지내다

김영삼 정부 때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지냈으며

2006년 지병으로 별세하였습니다.

김오랑 소령

신군부의 무장병력에 맞서

홀로 정병주 장군을 지키다 사망한 그는

10년이 넘게 추서되지 못하다

아내인 백영옥 여사에 의해

중령으로 추서되었습니다.

김오랑 소령의 부모님은 아들의 비참한 죽음에

화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백영옥 여사는 충격으로 실명이 되었으며,

이후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던 중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의문의 실족사를 하게 됩니다.

정선엽 병장

국방부 청사 사수 명령을 받고

후문을 지키던 정선엽 병장은

달아난 대부분의 초병을 뒤로한 채

끝까지 제1공수특전여단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전역을 3개월 앞둔 시점이었죠.

당시 신군부는 반혁명 군이므로

국립묘지에 안장시킬 수 없다며

현충원 안장을 거부했지만,

유족들의 노력 끝에 결국 안장되게 됩니다.

윤흥기 준장

9공수여단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던 윤흥기 준장은

12.12 군사 반란 직후

여단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1983년을 끝으로

사실상 강제 전역을 당하게 됩니다.

1993년 정승화, 장태완 장군 등과 함께

군사 반란을 주도했던 34명을

반란죄로 함께 고소하였으며,

201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윤성민 참모차장

강경 진압을 주장했던 장태완 장군과는 달리

유혈사태를 피하려 했던 윤성민 참모차장은

연행되자마자 금방 풀려났고

신군부 세력에 회유되었습니다.

화합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려는

신군부 세력의 의도로

반란군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던

윤성민을 채택한 것이었죠.

이후 그는 제1군 사령관에 취임하며,

대장으로 진급을 했고

사실상 신군부의 일원으로

전두환 정권 때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장관 퇴임 후에도 한국 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대한방직협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까지 지내다

2017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

 

작전의 지휘, 진압에 대한

초동대처를 뒤로 한 채

미사령부로의 도피를 비롯해

차로 두 시간 동안 서울시내를 배회하며

도망치기 바빴던 인물입니다.

유혈 충돌 방지라는 이유를 들먹이며

장태완 장군에게 투항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권유를 했죠.

그는 군사 반란 직후 사퇴하였으며,

1981년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한국비료공업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정계에 진출도 하며 91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자유민주연합 특임위원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행보를 보여왔습니다.

2019년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황영시 중장

군사반란 가담자 중

전두환보다 선배 장성이었던

유학성 중장, 차규헌 중장을 비롯한 3인 중 1인이자

신군부 핵심 5인 중 1인으로

쿠데타 직후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하였으며,

1980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고

제3야전군사령관을 거쳐

육군 참모총장에도 올랐습니다.

제11,12대 감사원장

민주정의당 상임고문겸 당무 위원을 지냈습니다.

그는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전차 발포와 헬기 사격을 포함한

무력진압을 지시한 전력이 있는데요.

당시 육군기갑학교장인 이구호 준장에게

전차 동원 지시를 내렸는데

이 준장이 전차가 나타나면

시민들이 드러눕는다며 항명을 하자

'전차포를 쏘고 밀고 가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1997년 12.12 군사 반란 및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과 관련하여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으나

8개월 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고

2022년 9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유학성 중장

12.12 이후 제3야전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거쳐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중앙정보부 부장, 안기부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제12,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96년 12.12 군사 반란 및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기소되어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구속집행정지를 받아 석방되었고,

대법원 재판 중인 1997년 지병으로 사망하여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후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박희도 준장

박희도는 정병주 사령관이

특히 아꼈던 부하로

그의 준장 진급 또한

정병주 장군의 힘이 컸을 만큼

둘은 두터운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요.

군사 반란 이전인 1978년

북한의 무장간첩이 당시 박희도가 맡고 있던

제1공수여단의 위수지역을 돌아다니며

군사기밀을 캔 후 임진강을 건너

복귀하는 데 성공까지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박희도는

군복을 벗을 위기에 처하지만

정병주 사령관의 갖은 노력으로

강제 전역을 피할 수 있었죠.

하지만 1년 후

박희도는 은인을 철저하게 배신하게 됩니다.

군사 반란 이후 그는 특전 사령관

제3야전군 사령관을 거쳐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고

1985년엔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습니다.

하지만 임기를 6개월 앞둔 시점

노태우에 의해 경질되어 전역했고,

이후 총선 출마를 하였지만 좌절되는 등

다른 하나회 회원들과는 달리

정계에는 발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12.12 군사 반란 혐의로 인해

징역을 살다 석방되었으며

이후 한국토지공사 이사장

보수 불교단체의 상임회장

서북청년단 고문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우익 시민단체에서

원로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세창 준장

제3공수여단을 이끌어

직송 상관인 정병주를 체포한 인물로

주요 요직을 역임했으며,

또한 그는 5.18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제3공수특전여단에

실탄 배부와 실탄 사용을 지시하는 등

시민 학살에 가담하였습니다.

1997년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1년 후 사면되었고요.

이후 뚜렷한 근황은 전해지지 않다가

201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일으킨 지

40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며

전두환 부부를 비롯하여 박희도, 정호용 등

10여 명과 함께 고급 오찬을 즐겼다고 합니다.

허화평 대령

전두환이 보안 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그의 비서실장으로 지내며 군사 반란을 설계한

전두환의 최측근인 인물입니다.

육군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한 후

1980년 대통령 보좌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하는데요.

이후 연좌제 폐지, 학생 두발 자율화 등

야간 통행금지령 폐지 등을 기획하며

5공화국을 주도적으로 설계하였고,

명실상부한 정권의 이인자로 자리 잡습니다.

하지만 1982년 전두환에게

토사구팽 당하며 좌천되었고,

노태우 정권이 등장한 이후

현대사회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이후 14대 15대 국회의원을 연임하였지만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유죄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고 이후 사면되었습니다.

그는 현재

정치, 교육, 사회, 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미래 한국재단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반란군과 진압군

12.12 사태 이후의 삶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출처> 리뷰한스푼 YouTube